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남송 전쟁 (문단 편집) == 제1전간기(1242~1257) == 몽골에서 [[귀위크 칸]]이 왕위에 올랐으나 서방 전선에 집중하느라 신경쓰지 못했고, 1247년에 장유가 사주를 공격했지만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그 이후 왕위에 오른 [[몽케 칸]]은 자신의 기반이 매우 약했기에 오고타이계를 숙청을 했고 이 때문에 몽골 내부가 뒤집어졌다. 한편 남송은 강남 특유의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 특히 사천 분지 일대는 남송 정권의 세금을 담당하는 중요 지역이기도 했다.]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 방어 체제였다. 이전 양회 전선에서 공을 세웠던 신임 사천제치사 [[여개(남송)|여개]]의 주도 하에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방어하려 하였다. 특히 그는 염진과 염박 형제의 건의로 합주에 조어성을 쌓았다. 안 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 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다. 송나라는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 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다. 특히 양양 지역의 방어력은 실로 강대했으며, 후술하듯이 이곳은 송나라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나오는 [[형주]]의 중요성이 역시 컸던 셈이다. 사실 [[형주]] 문서에 나오듯이 양양 지역은 중국 대륙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발원지인 [[우한시]]가 바로 [[형주]]지역에 있다.]. 사천은 양양보다 더욱 지형이 험하여서 진격이 어려웠고, 회수 하류에서 강남으로 곧바로 공격하기엔 곳곳에 있는 하천과 호수, 습지 등으로 인해 몽골군의 장점인 기병의 활용이 대단히 어려웠다. 즉 몽골군의 입장에선 이 양양을 반드시 확보해야 양쯔강으로 진격해서 남송의 수도인 [[항저우|임안]]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손오 정권 시절 [[육항]]은 형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후 [[사미원]]의 조카였던 [[사숭지]]는 일찍이 양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양양을 효율적으로 경영했다. 이후 사천 지역에서는 여개의 군대와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 사이에 소규모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여개의 명을 받고 흥원을 수복했다. 1254년 여개 사후 왕견이 사천 방어를 담당했는데, [[왕덕신]]이 이끄는 몽골군과 소규모 분쟁이 있었고, 왕견은 합주 조어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